본문 바로가기

청춘다반사

탈출 2


2. 기억

 

대략 십년 전쯤일 것이다. 영미가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니 아마 그쯤 되었을 것이다. 보다 나은

학군을 찾아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형순은 경주엄마를 처음 만났다. 새로 분양중인 아파트인지라 한창 이

삿짐센터의 차들로 북적거릴 때였다. 형순이 이사를 오던 날 공교롭게도 옆집 경주네도 이사를 왔다. 먼저

온 형순 탓에 두어시간이나 컨테이너차를 대기시켜야 했지만, 군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형순이 본 경주엄마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뽀얀 피부는 처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웠

고, 엄마를 쏙 빼닮은 경주도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아마도 경주와 영미가 친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동갑 터울에 새로 입학한 초등학교까지 똑같자, 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다녔다.

경주아빠는 평범한 회사원 이었는데 주말만 되면 엽총 한 자루를 들고서 이 산 저 산으로 돌아다니는 특이

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밀렵이 불법인 것도 모르는 형순의 가족에게 꿩이며 토끼 고기를 나눠주던 그가

떠올랐다. 제법 솜씨가 좋은 모양인지 멧돼지를 잡아오는 날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형순의 남편까지 나서

서 피에 절은 포대자루를 옮겨오곤 했었다.

다시 그 날로 돌아간다면 되돌릴 수 있을까. 형순은 가끔씩 그날을 떠올려 본다. 경주와 영미가 안방에서

놀고 있었고, 형순은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그야말로 평범한 날이었다. 별안간 찢어지는 폭발음에 형

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가자 바닥 곳곳이 불구덩이였다. 거칠게 찢겨 발겨진 스프레

이 통이 나뒹굴고 있었고, 아이들은 기절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영미야!”

형순이 재빨리 영미를 들쳐 업고 거실로 나왔다. 다리에 붙은 불을 자신의 겉옷을 벗어 대충 끈 뒤 다시금

안방으로 뛰어갔다. 경주가 불구덩이 속에 얼굴을 처박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경주를 일으키려던 찰나

막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한 도화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미가 좋아하던 세일러문도 보지 않은 채, 학교

숙제로 그린 가족그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당시의 형순은 불가사의한 힘에라도 이끌린 듯 도화지

를 집어 들었었다. 손바닥을 털어 도화지에 붙은 불을 끈 뒤 이빨로 그것을 물었다. 그러고 나서 경주를 안

고 거실로 나왔는데, 경주의 얼굴은 이미 처참하게 훼손된 후였다. 한쪽 눈꺼풀은 거진 타버려서 희멀건 동

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인중 쪽으로 뒤집혀 올라간 입술에서는 기괴한 수포들이 울룩불룩 솟아 있었

다.

충격을 받은 형순이 멍하게 있는 사이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폭발음을 듣고 들어 온 사람들이 안방에 붙

은 불을 끄고 119까지 불러 주었지만, 형순은 경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허겁지

겁 병원으로 달려 온 경주 엄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형순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신이 도화지를 줍지 않고 경주를 먼저 빼냈다면 괜찮을 수 있었을까. 수백

번 생각해 봐도 대답은 ‘아니오’였다. 2초도 안 되는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경주의 얼굴이 달라질 것 같

지는 않았다. 수포 한 두개쯤은 없앨 수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화상의 치료과정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형순도 잘 안다. 종아리에 난 손바닥만한 화상 치료에도 영미

는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댔었다. 하물며 경주는 오죽했을까. 둘은 같은 병원에 입원했고, 형순은 경주의

치료과정을 여과 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오랜 만이네요”

경주엄마의 건조한 음성에 형순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습한 공기와 함께 퀴퀴

한 냄새가 확 끼쳤다. 곰팡이 냄새에 옅은 지린내를 섞어 놓은 듯한 악취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거실로 올

라서자 기이한 광경들이 나타났다.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가구에 나일론 비닐들이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티비, 에어컨, 소파 할것 없이 모조

리 불투명한 비닐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전화기는 아예 코드가 뽑힌 채로 비닐에 둘둘 말려 있었다. 경계심

을 품고 형순이 주위를 살폈다. 전체적인 골격은 자신의 집과 비슷했지만 을씨년스러운 내부는 완전히 달랐

다.

형순이 어정쩡하게 서 있노라니 그녀가 앉을 것을 권했다. 바닥에 앉자 엉덩이를 통해 서늘한 기운이 전해

져 왔다. 그러고 보니 집안 전체가 싸늘했다. 형순의 머릿속에 비닐로 덮여 있을 보일러가 떠올랐다.

“대접할게 이것뿐이네요”

그녀가 오렌지 주스 한잔을 건네고는 형순의 맞은편에 앉았다.

“괜찮아요”

형순이 건네받은 오렌지 주스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근데 무슨 일로...”

그녀의 시선이 형순의 주스 잔으로 향한다.

“자주 찾아왔어야 했는데, 살다보니까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그녀가 침묵하자, 형순이 놓았던 잔을 슬그머니 다시 들어 올렸다.

"경주는 잘 있나요?”

억지로 주스를 한 모금 밀어 넣자 식도 입구에서부터 거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주스가 상하거나 하진 않

았겠지만, 부패한 우유를 마신 것처럼 기분이 메스꺼웠다.

“경주야, 나와 보거라. 영미아줌마 오셨다!”

그녀가 형순의 뒤쪽으로 고함을 치자 당황한 형순이 그녀를 말렸다.

“놔두세요, 자는가 봐요”

그녀가 아랑곳 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

“몇 년 만에 손님이 오셨는데, 계속 방구석에 숨어 있을 작정이냐”

형순이 한 번 더 말리려는 찰나에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경주의 방은 형순의 뒤편에 있었지만 정면에 매달

린 전신거울로 인해 모든 것이 비춰지고 있었다.

“스륵”

시커먼 뭔가가 방바닥을 쓸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머리카락인 것을 깨달았을 때 형순의 입은 저절

로 벌어졌다. 그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듯 시커먼 머리카락들이 허리와 다리를 지나 바닥까지 내려와 있

었다. 기다란 레이스 치마 역시 발끝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그것이 머리카락과 함께 바닥을 쓸자 기분 나

쁜 마찰음이 생겨났다. 발이 보이지 않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귀신같은 경주의 등장

에 형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녕...하세요”

경주의 입에서 철판 긁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두암 말기 환자가 성대에 기계를 연결해서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경주의 음성에 형순의 목덜미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별안간 이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맹

렬히 솟구쳤다.

“그...그래, 오랜만이구나..”

잠시 멈췄던 경주가 슬금슬금 걸어 형순을 지나쳤다. 제 엄마 옆에 선 그녀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헉’

경주의 얼굴에 형순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의료용 마스크를 쓴 상태였지만, 두 눈만은 오롯이

드러난 상태였다. 오른쪽 눈은 눈꺼풀부터 눈썹 중간까지 피부 가죽이 아예 사라진 상태였는데, 그 자리를

돌출된 안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말해 봐요”

경주엄마가 정적을 깨며 형순에게 말했다.

“다...다름이 아니구요, 목격자 진술을 부탁하려고 이렇게...”

“무슨 말이죠?”

형순이 경주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가서 말하면 되나요?”

“네?”

“그냥 본 대로 말하면 되냐구요”

“그...그래요..그냥 몇 마디 말만 하시면 끝납니다”

“그렇게 할게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형순이 허탈할 정도로 그녀는 쉽게 승낙했다.

“위험할 거 같아...”

조용하게 서 있던 경주의 입에서 다시금 쇳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녀는 딸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

은 채 물끄러미 형순을 바라봤다. 무심한 듯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형순은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경주는 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소독을 받았다. 검붉은 피딱지와 함께 싯누런 진물이 범벅이 된 붕대를

풀 때면 경주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었다. 소독이라고 해봐야 뭉개진 얼굴에 과산화수소를 붓는 것이

전부였지만, 장정 두 명이 달려들어야 할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소독약이 경주의 얼굴로 쏟아지면 새하얀 포말들이 끓는 것처럼 솟구쳤다. 고통이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경

주는 매번 경기를 일으켰다. 경주를 붙잡은 장정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때야 비로소 소독은

끝났는데, 어찌나 심하게 몸부림 쳤던지 경주의 환자복은 땀에 흠뻑 절어 있는 상태였다.

소독이 끝나면 간호사가 들고 있던 대바늘로 수포들을 터트렸다. 분화구처럼 부풀어 오른 수포들이 경주의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는데, 그것을 터트릴 때마다 역한 고름 찌꺼기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곤 했었다.

그녀는 그런 딸의 모습을 한 순간도 피하지 않고 함께 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새 붕대로 얼굴을 감쌀 때

면, 경주의 손을 잡고 안쓰러울 정도로 오들오들 떨어대는 것이었다. 그녀는 형순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저 꺼멓게 죽은 눈으로 형순을 바라볼 뿐이었다.

 

분사되는 스프레이에 불을 붙이고 놀다가 일어난 우발적 사고였다. 불씨하나가 주입구를 통해 통 안으로 들

어갔고, 압축된 가스가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 딸은 병신이 됐는데, 왜 영미는 무사한 거죠?”

경주아빠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을 때 형순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자신이 잘못한 것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해 겨울 경주아빠는 만취상태에서 도로를 건너다 덤프트럭에 깔렸다. 아파트 단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

는데, 목격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몸 전체가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펴져 있었다고 한다.

폭발 사고 후 영미는 병원에 있는 한 달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형순이 갖고 나온

그림 역시 제출 되지 못했다. 형순은 영미를 데리고 도망치듯 퇴원했고, 그 후 경주엄마와 경주를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일 년쯤 지나 경주도 퇴원했지만, 형순은 의식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그들을 피해 다녔

던 것이다.

 

“위험 할 것 같아”

경주가 재차 입을 열었을 때 형순이 대답을 했다.

“그렇지 않아, 모두 비밀로 하고 게다가...증인보호 프로그램도 있어”

형순이 시사 프로그램에서 들은 단어를 급한 대로 빌려 썼다. 경주가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 고요히 바라본

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떳떳하다는 표시로 경주의 허연 눈알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주었다.

형순이 신발을 신고 현관을 빠져 나갈 때 두 모녀가 나란히 서서 배웅을 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문을

닫으려는 순간에 경주가 빠르게 다가왔다.

“무슨 일 생기면 아줌마가 책임져야 합니다”

 


다음 날 형순은 경주엄마와 함께 경찰서로 출두했다. 이중유리로 이루어진 취재실안에서 형순을 협박하던

사내가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형사가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책

상으로 향했다.

“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구속까지 일사천리로 진행 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한형사는 경주엄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두 달이나 세 달쯤 후에 재판이 열릴 겁니다. 그때 두 번 정도만 더 법정에서 진술해 주시면 놈은 꼼짝없

이 교도소행 입니다”

“또 말해야 한다구요?”

그녀의 반문에 형순이 초조한 낯빛을 띄었다. 한형사가 형순을 한 번 슬쩍 쳐다보고는 그녀에게 또다시 넉

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간단합니다. 판사가 물어보는 대로 대답만 하면 끝납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져서 한 두 번 만에 끝내거든

요.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녀는 전혀 재밌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말없이 손가락만 꿈지럭거리고 있었는데, 지켜보던 형순도 덩달

아 침묵했다.

“알았어요”

 

경찰서를 나와 두 사람은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흉물스런 자국이 뒤 트렁크에 여전히 나 있었지만 형순

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데 집에 비닐들은 왜 씌워놓은 거예요?”

“사용하지도 않는 걸요, 돈도 없구요”

아뿔싸.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녀에겐 월급을 가져다주는 남편이 없다. 그녀도 별다른 직업이 없는 마

당에 당연히 돈이 부족할 것이다.

“여태껏 보험금 때문에 먹고 살았는데 이젠 그것도 거의 안 남았네요”

“아, 죄송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어디 식당이라도 나가야 되겠어요, 경주 그년이 지 아빠 닮아 고기를 좋아하거든요”

CCTV가 보이는 곳으로 골라서 주차를 마치자 둘은 차에서 내렸다. 같은 동에 사는 주민 두 명이 둘의 모습

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바로 옆에 살면서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

었다. 집에 오자 영미가 간식을 먹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와?”

“경주엄마랑 경찰서에”

“뭐? 누구랑 갔다고?”

영미는 입 안에 있던 과자 부스러기들을 마구 뱉어내며 되물었다.

“너도 가끔 경주한테 찾아가봐, 그래도 어릴 땐 친했잖니”

영미가 고개를 흔들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형순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영미가 다짜고짜 화를 냈다.

“엄마, 좀 치사한 거 아냐?”

“무슨 말이야?”

“이때까지 모른 척 하다가 필요해 지니까 찾아가고 말야”

“너, 말이 심하다”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봐! 엄마가 경주엄마라면 기분 안 나쁘겠어?”

영미의 말에 형순이 울컥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영미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야? 응? 다들 증언해주기 싫어하는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구”

“안 하면 되잖아! 누가 신고하래? 그냥 넘어 갔으면 아무 일 없잖아”

철썩. 형순이 영미의 뺨을 모질게 후려쳤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영미의 몸이 잔 경련으로 떨리기 시작했

다. 영미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형순이 넘어질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나쁜 년,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저녁에 퇴근한 상준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 물어 보았지만, 둘 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집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형순이 하루 종일 집안을 쓸고

닦자 새 집 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만족할만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저녁 무렵에 노부부 한 쌍이 방문

했는데, 시종일관 깐깐한 눈빛으로 집안을 살폈다. 형순과 상준이 열심히 입방정을 떨어댔지만, 별로 탐탁

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형순과 상준은 깨끗이 포기했다. 그들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둘의 예상과 달리, 다음 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노부부가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다. 새

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울적해 있던 형순이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머리가 허옇게 센 부동산 할

아버지한테 마구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에 영미와 상준이 돌아오자 미리 손질해 둔 소갈비를 구웠다. 영미는 여전히 뾰로퉁해 있었지만 아무

렴 어떠냐 싶었다. 상준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식사가 이루어졌다. 모두

의 밥공기가 거의 비워졌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세...”

형순이 현관문을 벌컥 열었을 때 문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

“경주...구나”

“우리 엄마 보셨어요?”

끼륵 거리는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니, 못 봤는데...엄마 아직 안 오셨니?”

경주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쓴 경주의 코 부위가 들썩거렸다. 비록 코가 있어야 할 부분

이 평평했지만 어림짐작으로 그곳이 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불에 녹아 버렸겠지만 후각은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경주가 갈비냄새에 반응을 보이자 형순이 마음을 먹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들어와, 같이 저녁먹자”

경주는 형순의 말에 선선히 따랐다. 경주가 거실을 지나 식탁 쪽으로 갔을 때 상준과 영미의 움직임이 일제

히 멈췄다.

“경주가 오랜만에 왔네, 당신도 알지? 옆집 사는 경주”

“그...그래 당연히 알지. 너 오랜만이다”

상준이 어색하게 웃자 경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영미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었는데, 상준이 툭툭 건

드리자 더듬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진...진짜 경주구나”

경주는 식탁대신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소파 전체로 퍼지자 거실 가득 그로테스

크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배가 고팠을 테지만 웬일인지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마 엄마가 걱정 됐기

때문이리라.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긴 침묵이 흘렀다. 습한 날씨에 분위기까지 고요하자 형순의 가슴속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따르르르릉”

적막을 깨고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형순이 흠칫 놀라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저 한 형사입니다”

“네, 잘 지내셨죠?”

잠시 동안 수화기에서 침묵이 흐른다.

“말씀 하세요”

형순은 상준을 바꿔 주려다가 묘한 기분이 들어 그만 두었다.

“이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참...”

그의 음성에 강한 껄끄러움이 묻어 나왔다.

“신명희씨 있잖습니까?”

“누구요?”

“진술 하러 같이 오신 분 말예요”

“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죠?”

또다시 침묵이다. 소파에 앉아 있던 경주가 고개를 들어 형순을 바라본다.

“죽었습니다”

[출처] 아갈갤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