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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다반사

탈출 3

3. 탈출

 


수화기를 든 형순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형순

을 움직이게 한 것은 경주의 시선이었다. 경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주시하자 형순이 억지로 입

을 열었다.

“어쩌다가요?”

“가슴에 칼을 찔렸어요, 천만다행으로 찌른 놈을 잡긴 했는데 아무래도 박용식이 똘마니 같습니다“

“...그렇군요”

형순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철저히 비밀로 했거든요.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없어요”

형순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것을 주민들 몇 명이 쳐다보고 있던 광경

이었다. 형순이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반나절도 되지 않아 아파트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

다. 진술을 부탁하기 위해 방문한 집만 해도 제법 되니 소문은 더 빨리 퍼졌을 수도 있다.

“네...”

형순의 무서울 정도로 덤덤한 대답에 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

“목격자가 있으니까 곧 자세한 정황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목격자. 목격자. 그놈의 목격자가 문제였다. 안전할거라고 장담하던 형사의 혓바닥을 다리미로 지져 버리

고 싶었다.

“혹시 가족 분들 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조회해 보니 따님이 한 분 있는 걸로 나오는데, 집으로는 아

무리 전화해 봐도 안 받더라구요”

“아뇨,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죄송한 부탁이지만 따님을 보시거든 제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직접 가야 되는 건데

갑자기 비상이 걸려서요”

그는 송구스럽다는 음성으로 형순에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그의 뒷말을 적당히 끊은 채 형순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누구야?”

상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관리실 아저씨야”

“응? 그 사람이 무슨 일로?”

“별거 아닌데, 도시가스 파이프 하나가 얼었나봐. 가스 잘 나오는지 물어보더라구”

“으...응”

형순이 눈짓을 보내자 상준이 어색하게 수긍을 해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형순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경주의 시선이 상준을 향했다가 다시금 형순을 향한다. 희멀건 안구가 또르륵 굴러가는 것을 보며

형순이 생각을 굳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주가 알게 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죽은 사실을 알면 경주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일 생기면 아줌마가 책임져야 합니다’

며칠 전 들었던 말이 다시금 귓전을 울렸다.

“경주야 일단 밥 먹자, 엄마 오늘 안 오실지도 몰라”

“......”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당분간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비밀요?”

“응,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일자리 구한다고 잠시 어디 가셨거든”

“일자리...?”

경주의 마스크가 불룩하게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두 눈 가득 의심의 눈

초리로 채워졌다.

“너...너도 알고 있었잖아. 느이 엄마 요즘 일자리 구한다고 하시는 거”

“맞아요, 근데...”

경주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형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는 사실까지 아줌마가 어떻게 알죠?”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상준과 영미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지켜만 보았다.

‘침착하자, 유형순! 이 아이는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어. 섣불리 대답했다간 금방 들통 날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오시거든 한 번 물어봐. 왜 나한테만 말했는지 말야”

형순이 입술은 다문 채 볼 근육만을 이용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경주가 돌아가자 상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경주 엄마가 죽었어”

“뭐?”

“정말이야?”

상준과 영미의 입에서 동시에 반응이 튀어 나왔다.

“아까 전화, 관리실 아저씨가 아니라 경찰서에서 걸려온 거였어”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왜 죽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살해 당했대...”

“자세히 좀 얘기해봐, 그러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살해를 당해?”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뭐?”

“당신이 그 빌어먹을 형사한테 신고했기 때문에 죽은 거라구”

“아...”

상준이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경주한테 말 안했어?”

“당신 같으면 그 상황에서 말이 나왔겠어?”

“그럼 어떡해, 어차피 경주도 알게 될 텐데”

“안전할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경주한테 말했었다구!”

버럭 고함을 지르던 형순이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아찔한 두통이 미간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할퀴고 지나갔

다. 형순의 말에 상준이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건데?”

영미가 형순에게 물었다.

“이사 갈거야. 경주에게는 며칠만 비밀로 하면 돼. 여기 계속 있다간 우리까지 위험해져”

“세상에...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아빠 무슨 말 좀 해봐!”

상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버리자 영미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쳤어, 다들 미쳤어”

 


다음 날 상준은 몸살을 핑계로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사실 결근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형순의 강경한 태

도에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둘은 오전에만 열 집 가까이 방문했다. 아파트든 빌라든 상관없었지만, 지금 사

는 곳과는 최대한 떨어진 곳이어야 했다.

상준의 회사야 어차피 중심가에 있었기 때문에 교통 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점심은 이동 중에 햄버거로 때

웠고,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망설이지 않고 빠져 나왔다. 아마도 집 주인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황당

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후에도 번번이 허탕을 쳤다. 상준이 관심을 보이는 곳은 더러 있었지만 형순이 마음

에 들어 하지 않았다.

늦은 저녁을 다시 햄버거로 때우고는 대방동으로 향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 집이 거의 마지막일 듯싶었

다. 신축한 지 삼년도 안 된 아파트였는데, 급매물로 올라온 것을 운 좋게 발견한 것이다.

집 주인은 사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 투자 개념으로 사둔 것을 좀처럼 값이 오르지 않자 내놓은 것이었다.

주인이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인테리어가 깔끔한 것이 형순의 마음에 들었

다. 베란다와 보일러실까지 돌고 온 상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순이 주인한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형순이 선금으로 오백만원을 내자 주인이 양도계약서를 작성해 주었다. 이제

중도금과 잔금만 치르면 계약서에는 자신들의 붉은색 인장이 찍힐 터였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도착했다. 지하주차장은 퇴근한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리저리 돌아봐도 빈자리

는 쉽게 발견 되지 않았다. 그렇게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을 때 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한형사, 그래 지금 나랑 있어. 왜?”

상준의 말에 형순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툭툭 건드렸다.

“뭐? 아, 잠깐만”

상준이 용케 알아듣고는 핸드폰의 스피커기능을 작동시켰다.

“....두 분이서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응, 볼일이 있어서 말야”

“사모님 좀 잠깐 바꿔 주시겠습니까?”

“저도 듣고 있어요, 말 하세요”

형순의 대답에 그가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그러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신명희씨 말인데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래도 부검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사인이 명확하지가 않아요. 흉부관통상으로 봤는데, 검의관 말

로는 아닐 수도 있답니다. 신명희씨 집에서는 계속 전화를 안 받구요”

“부검하는데 가족들 동의가 꼭 필요한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연고자 없는 사체의 경우에는 임의로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꺼림칙한 면이

있죠”

“그럼 일단 하세요. 제가 그 집으로 직접 찾아 가볼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날 밝는 대로 방문할 생각이거든요”

“아...네”

형순과 상준의 시선이 중간에서 얽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무슨 핑계를 대야 그가 찾아오는 걸 막을

수 있을까. 형순이 잠시 고민하느라 말이 없자 한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약간 걱정이 돼서 전화 드렸습니다”

“걱정이라니?”

상준의 반문에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전화해도 아무도 안 받길래 혹시나 했죠, 신명희씨처럼 무슨 일 생긴 건 아닐...”

“잠깐만요! 전화한 시각이 언제죠?”

“방금 전이요, 십 분도 안됐을 겁니다”

“오, 맙소사”

 

형순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오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형

순에게는 지독히도 느리게 보였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입술을 물어뜯으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 시간에 영미가 잠들었을 리는 없다. 늘 새벽까지 영화를 다

운 받아 보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일일까.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할 정도로 영미는 느긋한 성

격이 아니었다.

‘대체 왜 안 받은 거지? 피곤해서 일찍 잠든 걸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띵, 두둥”

그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형순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엘리베이터로 옮겨 놓자 상준이 칠층의 버튼을 눌

렀다. 칠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형순이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영미야!”

집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영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

“야 이 망할 기집애야, 집에 있으면서 전화는 대체 왜 안 받았어, 응?”

깊은 안도감이 지나간 후에는 억울한 감정이 찾아왔다.

“악, 아퍼! 왜 때리고 난리야”

형순이 팔뚝을 철썩 때리자 영미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게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것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형순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장실에 있었단 말야, 그럼 나보고 일보다 말고 전화 받으란 말야?”

 


형순은 밤새 뒤척거렸다. 내일 한형사가 찾아 올 것을 생각하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 정도

만 더 있었다면, 아니 하루만이라도 좋았다. 딱 하루만 늦게 온다면 그 사이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도의적인 비난은 받을지언정 법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혼자 남

겨질 경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뒤이어 떠오르는 그녀의 추악한 용모에 그런 생각은 슬그머니 사

라져 버렸다.

날이 밝자마자 형순이 침실을 빠져 나왔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뻑뻑한 눈알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그

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계획하나가 떠올랐고, 그것 외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우선 용역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인부 세 명과 용달차 한대를 요구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제가 말씀 드린 장소로 오셔서 대기하고 있어 주세요, 바로 작업할 수 있게요”

조금 특이한 요구였지만, 직원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승낙했다. 통화를 끝내고서 출근하려는 상준을 붙잡았

다.

“오늘 그 사람들한테 돈 받아서 입금 시킬 테니까 저녁에 영미 데리고 새 집으로 가 있어, 당신이 더 빨

리 마치잖아”

“벌써? 아직 가구도 안 옮겼잖아”

“옮길 거야, 맨바닥에서 자게 하진 않을 테니까 내 말대로 해”

상준이 미덥잖은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

“그냥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는게 어때?”

“당신이 말해 준다면 기꺼이 찬성 하겠어”

“아니다, 그냥 새 집으로 갈게”

상준과 영미가 나가고 나자 형순이 다시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CF에서 자주 들어 봤던 클래식 선율이 흘

러나오고 잠시 후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영미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아무도 없어요, 학교에 간 것 같은데 불러도 대답이 없네요”

“그래요? 이거 어쩐다...그래도 일단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따가 밤에 와보세요, 고등학생들 보충수업 여덟시 넘어서 끝나거든요. 지금 와봤자 헛걸음

만 할 텐데요 뭘”

“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찰칵. 한형사와의 통화를 마친 후에도 형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노부부에게서 오전까지 입금을 약속 받

고 나자 일이 술술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용도실에 처박혀 있던 박스들을 꺼내 귀중품부터 차근차근

챙겨 넣었다. 장식품이나 전시된 물건들은 가급적 피하고 서랍이나 장롱속에 있는 것들을 위주로 차곡차곡

담아 나갔다.

안방과 영미 방에 있는 옷들을 모조리 꺼내서 거실 중앙으로 모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어서 나중에는 박

스뿐만 아니라 보자기, 심지어는 담요까지 동원해 말아 넣었다. 고된 작업이 끝났을 때 시간은 어느새 정오

가 훌쩍 넘어 있었다. 문득 공복감이 밀려왔지만 이 상황에서 도저히 뭘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혹

시 그 사이에 경주라도 찾아온다면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용역센터 직원이 알려준 인부 한

명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705호로 올라오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 아셨죠?”

그들의 입장에서는 횡재한 날일 것이다. 기껏 잡담이나 나누면서 반나절을 때웠으니 말이다. 혹시나 싶어

현관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경주의 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금세라도 벌컥 문이 열리고 경주가 튀

어 나올 것만 같았다.

오 분쯤 지나자 인부 셋이 라텍스 장갑을 낀 채 나타났다. 형순이 재빨리 그들을 안으로 들인 다음 문을 닫

았다.

“여기 있는 짐들을 차에다 옮겨 주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

“아줌마! 아침도 못 먹었는데 밥 먹고 하죠, 자장면 세 그릇만 시켜 주세요. 기다린다고 배가 고프네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사내 하나가 능글맞게 말하자 남은 두 명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이거 다 옮기시면 자장면이 아니라 탕수육도 시켜 드릴 테니까, 우선 옮겨 주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용하게요, 시끄럽게 하시면 탕수육은커녕 자장면도 없습니다, 아셨죠? 끝

내신 다음에는 아까처럼 차에서 대기해주시구요”

형순이 재차 정숙을 강조했다.

"뭐 알겠습니다. 양도 얼마 안 되는데 끝내고 먹는 것도 괜찮겠네요”

대머리 사내가 찬성하자 형순이 검지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렸다.

“정확히 십 분 후에 움직여 주세요”

 

 

“띵 동”

초인종이 울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띵 동”

두 번째 초인종이 울렸을 때 현관문 건너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경주야, 영미 엄마야! 문 좀 열어봐”

문이 열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는 아직 안 왔니?”

“...네”

성큼성큼 들어서는 형순의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인부가 짐을 옮길 동안 시간을 버는 것. 그것

이 방문의 목적이었다.

“아무래도 직장을 구하신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겠니? 지금쯤 교육 같은 거 받고 집으로 오

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형순이 짐짓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아줌마...”

“응?”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뭐? 숨기다니? 숨기긴 내가 뭘 숨겨”

안면부로 더운 피가 확 몰렸지만, 형순은 용케 말을 더듬거나 하진 않았다.

“기분이 이상해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순간 바깥 통로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주의 고개가 현관으로 돌아가자 다급해진 형순이 아무

말이나 꺼냈다.

“경찰에 신고 해 볼까?”

속으로 인부들을 저주하며 형순이 경주의 반응을 살폈다.

“말이 조금 이상하네요”

“응? 이상하다니, 뭐가?”

“좀 전에는 분명히 집으로 오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형순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형순의 고개가 슬쩍 바닥을 향한 뒤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다시 정

면으로 올라왔다.

“혹시 모르니까, 만약을 대비...”

“그만 하세요!”

경주의 입에서 비명 같은 짐승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번에 얘기했죠, 아줌마 말에 책임지라고”

경주가 천천히 목을 젖히고 눈알만을 내리깔았다. 그 탓에 마스크 아래 공간을 통해서 그녀의 문드러진 입

부분이 드러났다. 아랫입술은 바싹 말린 동태처럼 쭈글쭈글 오그라들어 있었고, 윗입술은 절반만이 인중 쪽

으로 말려 올라가 시뻘건 잇몸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겨...경주야...”

그녀는 자신의 어떤 포즈가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쿵 쿵”

또다시 통로에서 소음이 들렸지만, 경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줌마, 누가 이사 가나 봐요...”

형순이 덜덜 떨리는 팔을 슬며시 뒤로 감췄다.

“혹시 아줌마네 집은 아니겠죠...?”

경주가 사전 동작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공기의 압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들이 양옆으로 휘날렸다.

“확인해 봐야겠어요...”

말려야한다. 형순의 머릿속에서 세찬 경보음이 울려댔다. 본능적으로 형순도 따라 일어섰다. 경주가 현관으

로 몸을 비틀려는 순간 형순이 경주방의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여...여기가 네 방이니?”

“건드리지마!”

경주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형순을 거칠게 밀어 버리곤 부서질 듯이 방문을 닫았다.

“아악”

부엌 쪽으로 난 벽에 형순의 등이 모질게 부딪혔다. 엄청난 힘이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몇 초간 숨쉬

기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경주는 그런 형순을 버려둔 채 현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철컥”

문을 열고서 경주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살피던 그녀가 다시 형순에게 다가왔다.

“아줌마, 앞장서세요...아줌마 집에 한 번 가봐야겠어”

“뭐...뭐라고? 대체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확인만 할게요, 엄마 오실 때까지 아줌마가 도망가면 안 되잖아요”

그녀의 음성은 단호했다. 형순이 집을 나와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 때까지 그녀의 끈적거리는 시선이 거머

리처럼 따라붙었다.

“철컥”

문이 열리자 형순을 제치고 경주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변한 것이 없었다. 가구도 그대로였고, 액

자와 전시해 놓은 양주병도 그대로였다. 적어도 외관상 형순의 집은 경주가 보았던 며칠 전과 조금의 차이

도 없었던 것이다. 베란다에 널려 있는 빨래까지 확인하자 그녀가 선뜻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제가 아줌마를 잠깐 의심했네요...”

경주가 형순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의 어깨를 형순이 재빨리 붙잡았다.

“밥 먹구 가, 너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지?”

경주의 마스크가 조금 떨려왔다. 형순의 말이 무척이나 의외였던 모양이다.

“괜찮으니까 먹어도 돼, 배 많이 고프지?”

형순이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다 식탁으로 옮겼다. 밥까지 푸짐하게 푼 다음에 경주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와서 먹어”

“아줌마...”

경주가 망설이자 형순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괜찮으니까 어서 먹어, 불편하면 딴 데 가 있을게”

“고마워요...사실 어제부터 못 먹었거든요...”

경주가 식탁에 앉자 형순이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왔다. 경주는 형순이 완전히 베란다로 나간 것을 보고서

야 마스크를 벗고 식사를 시작했다. 경주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언뜻 언뜻 드러나는 피부는

구토가 치밀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형순이 밑에서 대기하고 있을 인부들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줌마! 안 그래도 지금 막 올라가려던 참입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밥은 왜 안주는 겁니까?”

그토록 당부했건만 쿵쿵거리며 소리를 내던 그들을, 형순은 이빨이 덜덜 거릴 정도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지금 손님이 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요 근처에 중국집으로 가서 드세요”

“우리 돈으로 사 먹으라구요?”

‘아무것도 안 했잖아, 뻔뻔한 새끼들아!’

형순은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나중에 드릴 게요”

그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순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식사를

하고 있는 경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추악한 년’

형순이 원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경주를 속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문득 현기증이라도 난

것처럼 어지러웠다. 귀속이 웅웅거리며 시야가 깜깜해지자, 손을 더듬어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밀

물처럼 들어온다. 그렇게 바깥바람을 쐬고 있자니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아줌마...”

베란다가 열리고 경주가 나타났다. 마스크까지 쓴 걸 보니 식사를 끝낸 모양이다.

“잘 먹었습니다...이만 가볼게요...”

“가려구? 그래...가서 좀 쉬어. 기다리면 연락 올거야”

경주가 돌아간 뒤 형순은 제일 먼저 부엌으로 달려갔다. 식탁이 깨끗했다. 반찬들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

고, 그릇과 수저도 씻어 놓은 상태였다.

“젠장”

한줄기 불쾌한 기운이 목덜미를 간질거렸다. 건조대를 뒤져 경주가 씻어 놓은 그릇을 집어 들었다. 물방울

이 주르륵 흘러 내렸지만, 그것이 마치 냄새나는 고름처럼 느껴졌다. 그릇을 쓰레기통에 박아버리고 수저통

을 뒤졌다. 한참을 뒤져봐도 구별이 안 가자 그것들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다.

 


형순이 긴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주변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는 상태였다. 물먹은 솜 마냥 온몸이 축 늘어

졌지만,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계획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다. 경주가 돌아간 뒤 형순은 노부부에게

서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인출한 다음 인부들과 대방동으로 향했다.

형순의 연락으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주인에게 돈을 건네 준 뒤 열쇠를 받았다. 싣고 온 짐을 모두 옮긴

뒤 곧바로 인부들을 돌려보냈는데, 저녁까지 요구하는 그들에게 형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노골

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오는 길에 약국도 잠깐 들른 다음, 입력해 둔 이삿짐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공동주택이상에서는 원칙적으로 해가 저문 이후에 이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

었다. 약간의 웃돈을 지불하자 어렵지 않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집으로 온 형순이 제일 먼저 한 것은 먹다 남은 갈비를 꺼내 불판에다 올려놓는 일이었다. 불판에서 갈비

가 익어 가는 동안 약국에서 사온 삼 일치 수면제를 잘게 부수었다. 그것이 고운 가루로 빻아지자 적당히

흠집을 내두었던 갈비살 사이로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뿌려 넣었다. 이윽고 연한 속살이 검붉은 갈비소스를

머금은 채 노릿노릿 익었고 매콤한 연기과 함께 군침 도는 냄새가 한가득 풍겨 나왔다.

 

“띵 동”

갈비접시를 손에 든 형순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시각 저녁 일곱 시. 앞으로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쯤

후에는 한형사가 올 것이다. 그전에 경주를 재워야 한다.

“이것 좀 먹어봐, 너 고기 좋아하잖아. 설마 벌써 저녁을 먹은 건 아니겠지?”

형순이 들고 있던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자 경주가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줌마...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그녀도 기다림에 한계가 온 모양이다.

“그래 그러자, 안 그래도 신고할까 생각 중 이었어. 그건 아줌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식기 전에 어서 먹

자”

은색 호일 사이로 진한 갈비향이 풍기자, 경주의 마스크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소식없는 엄마가 걱정이 되

면서도 생리적인 욕구는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경주의 문드러진 콧구멍이 벌렁대고 있을 것을 생각하

자 경멸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잘 먹을게요...”

경주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형순이 고개를 돌렸다.

“넉넉하게 구웠으니까 실컷 먹어, 아줌마는 저쪽에 앉아 있을게”

형순이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매끄러운 비닐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

했다.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주가 갈비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꼼짝 않고 있으려니 쩝쩝거림과 함께 간간이 들리던 역겨운 트림소리가 잦아들었다. 식사를 끝내려

나 보다.

“후아암, 오늘 좀 피곤하네. 경주야, 아줌마 잠깐 눈 좀 붙일게”

형순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금세 몸 전체로 으스스한 한기가 찾아왔지만 아무

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후아아암”

또 한 번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하품을 해댔다. 식사를 끝낸 경주에게선 말이 없다. 틀림없이 자신을 쳐

다보고 있을 테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십 분이나 흘렀을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삭 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철커덕”

경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형순은 한참을 누워 있었다. 현재 시각 여덟시 십분. 형순이 유령처

럼 몸을 일으켰다.

“경주야, 자니?”

아무 대답이 없다.

“경주야, 자니? 아줌마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

음성을 조금 높였지만 역시 반응이 없다. 방문을 열자 컴컴한 어둠 속 한쪽에 시커먼 덩어리가 보였다. 경

주는 이불도 깔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고 형순은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 나왔다. 통로에서 내려다보자 대형

크레인 한 대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각이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곧 자동응답기로 연결이 됐다.

-한형사입니다. 어디 가셨나 봐요?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거의 다 왔어요. 오시면 연락 주세요-

형순은 문을 걸어 잠근 뒤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불까지 모두 끄고 나자 집 전체에 적막이 흐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한형사가 도착했다. 그는 경주의 집 초인종을 서너번 눌러 보더니 반응이 없자 이번에

는 형순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짐작컨대 상준에게 전화를 거는 듯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 버리자

형순이 방범구멍에서 눈을 뗐다. 크레인이 올라오고 있는 듯 멀찍이서 진동소리가 웅웅 울렸다.

타이밍이 예술이었다.

 

이사는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됐는데, 낮에 만난 인부들과 달리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형순의 요구를 착

실하게 따라 주었다. 하긴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형순의 요구가 없었어도 조용히 움직였을 터였다.

가구들이 하나씩 옮겨지자 집안이 조금씩 비기 시작했다. 침대를 크레인으로 막 옮기고 난 뒤 직원 중 한명

이 형순에게 말을 걸었다.

“장롱이 커서 문으로는 못 나오네요, 아무래도 창문을 뜯고 그리로 빼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오래 걸리나요?”

“한 삼십분쯤 더 걸릴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이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사단이 발생했다. 직원 중 하나가 화분을 옮기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다. 사

기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흙덩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조심하셔야죠!”

형순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도 시끄러운 것을 깨닫자 입을 다물었다.

 


“이제 끝났죠?”

집안은 형순이 예전에 이사 왔을 때처럼 완전히 비어있었다. 가구들이 모두 빠지자 공간이 훨씬 넓어졌지

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아뇨, 이제 창문을 뜯어내고 장롱을 빼야 합니다”

직원 중 하나가 창문에 손을 올리자 형순이 황급히 제지했다.

“그냥 두세요. 장롱은 안 옮기셔두 돼요. 그럼 진짜로 끝난거 맞죠?”

아무래도 불안했다. 화분 소리에 경주가 잠에서 깰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주소예요. 이리로 가시면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형순이 메모지를 건네자 직원들이 철수했다. 길게 뻗어 있던 철제 크레인도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 가버리

고 형순 혼자 남았다.

“위이이잉”

꺼두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밀린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부재중 36통?”

한형사에게서 걸려온 두 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준의 전화였다.

“철컥”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열려 있던 현관문 사이로 이질적인 소음 하나가 흘러 들어왔다.

‘맙소사’

형순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안방으로 도망친 형순이 장롱 문을 엶과 동시에 밖에서 누군가가 거실

로 들어왔다. 형순이 장롱 속에 숨은 뒤 문을 닫고 나자 비명소리가 터졌다.

“아아악, 뭐야 이게...”

그르렁거리는 쇳소리. 바로 경주였다.

“어디 간 거야...설마 도망간 건 아니겠지...”

경주가 미친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악을 써 가면서 중간 중간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중얼거렸다.

“따르르르릉”

컴컴한 장롱 속에서 떨고 있던 형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화가 울린 것이다. 경주의 소리도 일순 멈췄

다.

“따르르르릉”

한참을 울리던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자 자동응답기로 연결이 됐다.

-아직도 안 오셨나 보군요. 아까 신명희씨 집에 갈 때 잠깐 들렀었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한형사의 전화였다. 한형사는 혼자 말하는 것이 어색한지 조금 뜸을 들였다.

-직접 말씀드려야 하는데 바쁘신 것 같으니까 여기다 말할게요, 조금 전에 신명희씨 부검 결과가 나왔습니

다. 흉부관통상이 아니라 뇌좌상으로 판명됐어요. 아마 가슴 쪽은 죽고 난 다음에 찌른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죠...?”

경주의 억눌린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시죠? 영미 어머니신가요?-

“다시 말해보세요...신명희씨가 어떻게 됐다구요?”

-죄송하지만 전화 받는 분은 누굽니까?-

"신명희가 우리엄마예요..."

-아...-

수화기에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따님이시군요...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어머니께서는 이틀 전에 사망 하셨습니다-

마침내 경주가 알아버렸다. 자신이 무사히 빠져 나간 후에 알았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이곳에 숨

어 있고 경주는 진실을 알아버렸다.

-바로 알려 드렸어야 하는데, 계속 집에 안 계셔서 그러지 못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영미 어머니께도 말

씀 드려 놨는데...이것 참 면목이 없군요-

“으흐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별안간 우지끈 거리며 뭔가가 부서졌다. 한형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

리지 않는 걸로 봐서 경주가 전화기를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

“아줌마...우리 엄마가...정말 죽었어요...?”

그녀가 울부짖었다. 탁한 쇳소리만 낼 수 있는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어린 아이의 음성으로 울고 있었다.

“우리 엄마 죽이구...도망 가려고 했어요? 나 재우고 그 사이에 도망 가려고...?”

경주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흐느끼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형순이 재빨리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전화도 안 받고”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상준의 음성이 커다랗게 울렸다.

“한형사한테서 전화 왔었어, 집에 갔었는데 아무도 없다 길래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쿵 쿵”

별안간 거실에서 육중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여보세요? 당신 듣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

형순이 모기만한 소리를 내뱉었다.

“뭐라고? 잘 안들려 좀 크게 말해봐”

“신.고.하.라.구”

쿵쿵거리는 소리가 이내 안방으로 이어졌다. 가느다란 틈 사이로 포대자루 같은 것을 끌고 들어오는 경주

의 모습이 보였다.

“신고하라고? 이제 와서 무슨 신고를 해? 사실 고민해 봤는데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잘

못했다고 하면 내 생각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안 그래도 지금 영미랑 그쪽으로 가는 중이야”

‘안 돼, 오면 안 돼... 왜 또 혼자서 결정하고 그래...’

“쿠웅”

장롱 바로 앞으로 육중한 뭔가가 떨어졌다. 포대자루에서 나온 그것은 공 모양의 마스크 비슷했는데, 상당

히 무거운 듯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집안 전체가 시끄럽게 울렸다.

“쨍그랑!”

경주가 이번에는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부수기 시작했다. 안방을 시작으로 집안 곳곳에서 전구알 터지는 소

리가 들려왔다.

“오.지.마 그.냥.신.고.해”

“무슨 일 있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모퉁이만 돌면 주차장입구야”

전등을 모두 깨트린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히히, 아줌마...집에 있는 거 알아요...”

별안간 그녀가 개구쟁이 아이처럼 웃었다. 발걸음 소리가 안방 쪽으로 다가오자 형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줌마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장롱 앞에서 발걸음이 뚝 끊겼다.

“왜냐면요...”

“신발이 있었거든요!”

장롱의 문이 흉폭 하게 열렸다. 마스크를 벗어버린 경주의 모습에 형순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내리쳤고, 형순의 몸이 축 늘어졌다. 경주가 형순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자 손에 쥐여

있던 핸드폰이 떨어졌다. 그녀가 형순의 핸드폰을 주워든다.

“형순아!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이제 다 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저씨...”

“여보세요? 누구야, 경주니?”

“아줌마 방금 제가 죽였어요”

경주가 킥킥 웃으면서 형순을 질질 끌었다. 거실까지 끌고 나오자 형순에게서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

‘아...’

형순은 지금 비몽사몽간이었다.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고속의 회전목마라도 탄 듯 세상 전체가 빙글빙

글 돌았다. 흐려져 가는 시선 속으로 어둠속에 숨어 있는 경주가 보였다.

곧 상준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들어왔다.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형순에게는 마치 영화속의 슬로우 모션

처럼 느껴졌다. 상준이 뭔가를 밟고 넘어졌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듯이 입을 쩍쩍 벌려댔지만,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넘어진 상준의 너머로 영미가 나타났다. 시커먼 뭔가가 영미를 덮쳤지만 형순은 이미 의

식을 잃은 후였다.

 

 


[이 게시물은 알피님에 의해 2010-10-28 23:25:41 공포에서 이동 됨]
[출처] 아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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