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액운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재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그런 날 말이다. 종국에 가서
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운수 더러운 날. 왜 액운이 끼였다고 표현하
는 그런 날 있지 않은가.
형순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일요일이었지만 남편은 아침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동호회 사람들과 등산을 갔을 테지만, 일
언반구도 없이 사라진 남편에 대해 형순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깨우지 않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
지만, 어제라도 자신에게 말했어야 했다.
이건 기본적인 예의 문제였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사랑니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치과치료를 받았어도 전혀 내색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형순이 카드 명세서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남편은 놀랄 정도로 무덤덤하게대답했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몸에 깊이 베인 습관이었다. 부부라면 소소한 것마저도 공유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형순에게 남편의 행동들은 짜증을 넘어서 스트레스로까지 다가왔다. 형순은 소파에 앉아서 티비도 켜
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생각하면 할수록 심각한 결론으로 치달았
다.
“엄마, 왜 그러고 앉아 있어”
딸 영미가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로 나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형순이 영미를 쳐다봤다. 입덧 한지가 엊그
제 같은데 어느새 아이의 가슴이 불룩하다. 잠옷을 입었지만 드러난 굴곡들로 인해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젖
먹이 꼬마는 없었다.
“배고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부추 전 먹고 싶어”
영미가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그 부추 전 이었다. 형순은 기분전환도 할 겸 외출을 하기로 결심했다.
영미의 손을 잡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빽빽하게 들어찬 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
런지 주차장 전체가 만원이었다. 차에 다가갈수록 형순의 가슴속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주차해 놓은 통로 쪽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발, 어떤 새끼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내부사람 짓 이예요, CCTV 화면에 안 잡히는 차들만 골랐어요”
“저기, 무슨 일이시죠?”
형순이 다가가자 욕설을 하던 남성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어떤 후레자식이 싹 다 긁고 갔어요”
일렬로 늘어선 차들에 하나같이 굵은 줄이 그여 있었다. 뒤 트렁크부터 범퍼까지 날카로운 뭔가가 모조리
훑고 지나간 상태였다.
“아...”
자신의 경차도 그 속에 포함된 것을 확인하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주차장을 빠져
나가자, 저만치 순찰차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범인을 찾아내서 변상을 받을 거라는 희망은 가지지 않
았다. 혼자였으면 못하는 욕이라도 내뱉었겠지만 영미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형순은 부동산에 잠깐 들른 다음에 마트로 갔다. 부동산에선 여전히 소식이 없었고, 마트의 물가는 삼일 전
에 비해서 또 올라 있었다. 오천 원이면 충분하리라 여겼던 부추와 홍합의 가격이 팔천 원 가까이 육박하
자 형순의 앙다문 입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삐져나왔다.
"아줌마, 계산 안 하실거예요?"
펑퍼짐한 몸매에 뿔테 안경을 걸친 점원이 신경질적으로 재촉했다.
"잠깐만요, 동전 좀 찾구요"
형순은 걸치고 있던 가디건까지 벗고서 동전을 찾았지만 애초에 존재여부가 불투명했던 동전은 쉽사리 발견
되지 않았다.
"거 좀 빨리빨리 합시다"
형순의 뒤로 어느새 서너명의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대체 지갑을 왜 안 가져 왔을까. 평소 충동
구매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돈만 들고 다니는 형순이었지만, 어느덧 그런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저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이다. 결국 포장된 비닐을 뜯어 내용물을 덜어내고 나서야
간신히 가격에 맞출 수 있었다.
"현금영수증 할게요"
"뭐라구요?"
"현금영수증 한다구요"
점원의 말투에서 묘한 불쾌감이 전해져왔다.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이런데 처음 와 보셨어요?"
형순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 하자 점원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거기 번호 누르세요"
"이봐요! 당신.."
"아 그냥 닥치고 빨리 좀 갑시다"
형순의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형순이 돌아보자 어느새 십여명으로 불어난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카츄 빵을 손에 든 꼬마얘 까지도 자신을 원망하듯 쳐다보자 맥이 탁 풀렸다.
'돼지 같은 년이...'
집으로 오는 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동산만 아니면 가지 않았을 곳이었다. 점원의 눈알을 세 번째로
뺐다가 끼웠을 때 형순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영미에게선 아까부터 싸늘한 침
묵만이 풍겨져 나왔다. 자신이 창피했을 것이다. 딸의 입장이 이해는 가면서도 못내 섭섭했다.
“쿵”
순간 육중한 충격에 형순의 고개가 속절없이 젖혀졌다. 놀란 영미의 눈동자가 형순을 향한다. 정말 오늘 무
슨 날인가보다. 형순이 재빨리 앞쪽을 쳐다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백미러에 궁시렁 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사내 하나가 비쳤다.
“아줌마 내려 봐요”
단정히 깎은 스포츠머리에 갈색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였다. 40대 초반인 형순 보다는 어려 보였지만, 그
리 차이가 날 터울은 아니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할게요, 아줌마가 사과하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험회사 부르면 되니
까요”
사내의 말에 형순의 뱃속에서 뜨끈한 뭔가가 울컥 솟구쳤다.
“그쪽이 제 차에 박았잖아요, 지금 누구더러 사과 하라는 거죠?”
감정이 격양된 듯 커다란 소리가 튀어 나왔다.
“제 말을 못 알아 들었군요, 전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사과를 요구하는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불현듯 사내의 전두엽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사과를 해야지 내가 왜 하냐구요!”
“아줌마, 시비 그만 거시고...”
“지금 누가 시비를 거는데요, 그쪽이야말로 헛소리 그만하시고 전화번호나 주시죠”
두 사람 근처로 어느새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대부분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고, 몇몇은 같은
동에 사는 이웃이기도 했다. 형순의 시선에 자주색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의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옆
집 사는 경주 엄마였다. 떨떠름한 느낌과 함께 눈앞의 사내에 대한 적개심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전화번호 줄게요..”
사내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실룩 거렸다.
“아줌마가 사과하면요”
“아저씨 정신 나갔어? 우리 엄마가 왜 사과를 해야 되는 건데? 아저씨가 멀쩡히 있는 우리 차에 냅다 들
이 박았잖아! 아저씨 치매야? 방금 전 일도 기억 안나나 보지?”
형순의 머릿속이 분노로 새하얗게 변해있는 사이 영미가 사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사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눈꺼풀이 반이나 덮여 내리자, 얇게 변한 눈 속에서 사나운 살기가 뿜어
져 나왔다.
“가만히 있어, 어른들 일에 나서는 거 아냐”
형순의 영미를 나무랐지만, 내심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서 영미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오면 겁낼 줄 알아요? 정신병원이나 가보...컥”
사내가 순식간에 영미의 목을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안무라도 추는 것처럼 그의 손이 재킷을 쓰다듬자 잭나
이프 한 자루가 어느새 손에 들려 있었다.
“아악! 영미야, 오 맙소사. 무슨 짓이야 미친놈아!”
“꺽...억..”
사내의 억센 손줄기에 영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영미가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을 쥐어뜯었지만, 그
것은 요지부동 이었다. 형순이 사내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팔에 매달렸다.
“철컥”
어느새 튀어나온 잭나이프의 칼날이 형순의 턱밑으로 파고들었다. 사내는 영미를 아무렇게나 밀어버리고선
남은 손으로 형순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악”
두피가죽이 생으로 뜯기는 듯한 고통에 형순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
들었다. 단순한 접촉사고로 생각했는데, 칼이 튀어 나오고 비명이 터지자 모두가 꼼짝도 않은 채 사내를 지
켜봤다.
“잘 들어, 예전 같았으면 면상에 그림이라도 하나 그려 줬을 거야”
목에 닿아 있는 칼날에서 차가움 이상의 한기가 느껴졌다. 머리채를 붙들린 형순의 눈에 잔기침을 해대는
영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사과는 필요 없어, 그렇다고 변상을 안 하겠다는 말은 아냐. 그냥 좆같은 년들 만났다고 넘길 테니
까 더 이상 엉겨 붙지마”
형순이 칼날을 피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기 아줌씨들!”
사내의 잭나이프가 하얗게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얼굴 모조리 외우고 있으니까, 혓바닥 함부로 놀리면...”
사내가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로로 긋는 시늉을 했다.
“장담하건대 편하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 기억력을 시험하고 싶다면 한 번 해봐”
사내가 형순을 놓자, 뽑혀나간 머리카락들이 꽃잎처럼 흘러 내렸다. 고통에 비해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형순은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멍하니 주워들었다. 사내가 떠나고 난 뒤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정확하게 떠오
르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테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주위에 있
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꿈속을 헤매는 듯이 몽롱했다.
형순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고 나서였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등산복 차림의 상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형순을 바라보자 그만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오전까지 가졌던
남편에 대한 원망은 봄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형순이 자신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자 상준은 당혹해 하
면서도 형순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한참을 울던 형순이 입을 열었다. 주차장사건부터 해서 마트, 그리고 칼로 협박하던 사내까지 남김없이 털
어 놓았다. 얘기를 듣는 도중에 남편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사내가 영미의 목을 조르던 부분에서
는 굵은 눈썹이 위아래로 크게 꿈틀거렸다.
"영미는 어딨어?"
"방에 있을 거야..."
남편이 벌떡 일어섰다. 영미의 방에 들어간 남편이 일분도 되지 않아 다시 거실로 나왔다.
“전화번호 받은 거 이리 줘봐”
남편도 영미의 목에 남겨진 손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뱀처럼 영미의 목을 휘감고 있
었다. 붉게 물든 손가락 하나하나에 사내의 더러운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근데 신고하면 죽여 버린다고...”
“영미 상태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뭐?”
“얼마나 악질적인 놈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넘어가면 안돼, 당신이나 나나 영미 부모 노릇 계속 하고 싶으
면 반드시 신고해야 돼”
“당신이 못 봐서 그래, 사람들 없었으면 진짜 찔렸을 수도 있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형순은 불안해하면서도 사내가 내던지고 간 명함을 건네주었다.
“천도 캐피탈... 상무 박용식?”
상준은 곧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준의 모습에 형순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형순
이 본 사내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애당초 신고 따위가 겁났다면 결코 칼을 꺼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화를 하는 상준을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충격에 빠져 있을 영미를 떠올리자 그마저도 쉽
지 않았다. 상준이 한참 만에 통화를 끝내고 형순에게 고개를 돌렸다.
“동호회에서 알게 된 형사가 하나 있는데, 전화해 보니까 걱정하지 말래”
“걱정하지 말라고?”
“응, 양아치 같은 놈들이 그냥 겁주는 거래.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일이 벌어지나봐”
‘정말 그랬으면 좋으련만’
상준은 형사의 말에 심히 안심하는 눈치였지만, 형순은 그렇지 못했다. 까닭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
라 왔다. 사내의 가늘게 희뜬 두 눈이 형순의 전신을 훑는 듯 했다.
다음날 형사가 초인종을 누른 시각은 점심도 먹지 않은 오전이었다. 남편은 출근했지만, 영미는 방문을 걸
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 할때 형사가 찾아 온 것이다. 형사는 건장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호남형 이었다. 자신을 한지욱으로 소개한 형사는 뜨거운 커피를 서너 모
금 만에 비워버리곤 수첩을 꺼내들었다.
“칼로 협박하고 따님의 목을 졸랐다 이거죠?”
“네”
“거기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협박하구요”
“네, 맞아요”
“전형적인 동네 건달입니다, 아주머니께서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진짜 프로들은 그런 식으로 겁
을 주진 않거든요”
“진짜 프로들요?”
“프로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냥 또라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앞뒤 안가리고 덤벼드는 무
식한 놈들 있잖습니까”
“정말 그럴까요?”
“네, 저만 믿으세요. 그냥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참 명함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여기 있어요! 명함”
형사는 명함을 잠시 훑어 본 뒤 형순에게 입을 열었다.
“따님은 학교에 갔죠?”
형순이 고개를 저었다.
“창피하다고 방에서 안 나오네요, 학교에 말해놓긴 했는데 걱정입니다”
“제가 잠시 따님을 봐도 될까요?”
“영미를요? 아, 잠시만요”
형순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영미의 방문이 삐그덕 열렸다. 폴라티로 목 전체를 꼼꼼히 감싼 영미가 쭈삣
쭈삣 거실로 나왔다.
형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삼일이나 지난 후였다. 손자국이 눈에 띄게 희미해지자 영미는 학교에 나
갔고, 형순의 마음도 안정을 되찾아 가던 중이었다.
“한지욱 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박용식이 때문에 말인데요”
“박용식요?”
“칼들고 협박하던 놈 말예요”
“아, 네...”
“약간 문제가 생겼습니다”
뜬금없는 형사의 말에 형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제라뇨?”
“이 놈이 오리발을 딱 내밀고 있어요, 자기는 죽어도 그런 적이 없답니다”
“말도 안 돼”
“번거로우시겠지만 목격자 진술이 필요해요, 이 놈 배짱이 두둑해서 웬만한 말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네
요”
“아...”
수화기를 든 형순의 팔이 파르르 떨려왔다.
“목격자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해야 합니다, 구경꾼이 많다고 하셨으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석방 된다면 조
금 위험할 수도 있어요”
형사가 이웃 나라 뉴스라도 전하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이죠?”
“왜 일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프로들 말이예요”
“괜찮을 거라면서요!”
가슴을 졸이며 형사의 말을 듣던 형순이 소리를 빽 질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괜찮습니다, 제 실수도 있는 데요 뭘”
형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명만 있으면 됩니다,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에 한명만 진술해 주면 최소 오년이상은 감옥에 쳐
넣을 수 있어요”
통화를 끝낸 형순이 습관적으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냥 풀려나게 하든
지 아니면 오년간 감옥살이를 시켜야 했다. 지금 풀려난다 하더라도 해코지를 안 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경
찰서를 나온 사내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숨어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사내는 형순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잭
나이프를 정성스레 닦고 있을 것이다.
문득 남편에게 말을 꺼낸 사실이 후회됐다. 애당초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사내와의 인연은 며칠 전으로 끝
났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감옥살이를 시킨 다음에 멀리 이사 가서 사는 것이
다. 때마침 집도 부동산에 내놓질 않았는가. 그곳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터였다. 우리나라의 수사제도가 그
렇게 허술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심이 서자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누구세요”
“저예요, 705호 영미엄마”
문이 열리고 곱슬곱슬한 파마머리의 여인 한명이 형순을 반겼다. 여인은 형순이 들어오자 며칠 전의 사건
을 냉큼 화젯거리로 올려놓았다.
“진짜 무슨 일 나는 줄 알았어,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구”
과일쟁반에 한과까지 한상 차려지자 형순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 놈은 잡혔어?”
“네, 지금 경찰서에 있어요”
“흥, 쌤통이다. 그런 놈은 아주 그냥 푹 썩게 해 버려야 돼”
형순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같은 동에 사는 명희엄마였다. 반상회 날이면 어김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분기
탱천해 하던 그녀였다. 관리비부터 시작해서 물탱크 청소문제, 입주자들의 조망권 문제에까지 불만을 터트
리던 그녀였다. 그녀의 당찬 성격에 형순의 가슴속까지도 시원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명희엄마가 썰어놓은 과일 조각을 먹는 틈을 타 형순이 말을 꺼냈다.
“응?”
“증거가 부족하대요, 목격자 진술이 필요하다고...”
증거가 부족한 것이 마치 자기 잘못인 냥 형순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그냥 봤던 사실만 그대로 얘기해 주시면 돼요”
명희엄마는 말없이 과일만 씹고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술 끝으로 형순의 신경이 집중됐다.
“나도...해주고 싶은데, 요즘 우리집 분위기가 좀 안 좋아”
그녀는 형순의 시선을 피한 채 손가락으로 바닥 장판을 쓱쓱 문질러댔다.
“명희아빠 건강도 좀 안 좋고, 영미엄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얘들이 셋이나 있잖아..."
형순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결론은 꺼림칙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까지는 분명 희망이 있었다.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집을 나섰을 때도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희망
을 버리진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사방이 불그스름해졌을 때 형순은 다섯 번째로 들렀던 현수네 집에서 나왔다. 지평
선 끄트머리에 샛노란 노을이 잉크처럼 번져 있었고, 아파트 단지 전체가 음울한 빛깔에 깔려 있는 초저녁
무렵이었다.
“띵동”
형순이 마지막으로 207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혼자살고 있는 이혼녀의 집이었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으
니 분명히 도와줄 거라고 믿으며 남겨둔 히든카드였다. 두 번째로 초인종을 눌렀을 때 현관문 아래로 새어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형순은 한번 더 눌러볼까 망설이다가 그냥 돌아섰다. 누가 전해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미 형순의 방문목적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방은 이제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고, 형순이 지나
갈 때마다 복도 등이 하나씩 켜질 뿐이었다.
집으로 오자 아무도 안온 듯 불이 꺼져 있었다. 열쇠를 꺼내 구멍에 꽂으려는 순간에 옆집의 문이 눈에 들
어왔다.
‘그래, 경주 엄마도 있었지’
자주색의 주름치마를 입고 있던 경주엄마가 떠올랐다. 퀭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녀가 떠오르자 형
순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차마 그녀에게는 부탁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혹시...’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형순은 정말로 내키지 않았지만 한 번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초인종의 감촉이
괴물의 눈알을 누르는 것처럼 소름이 돋아왔다.
“띵 동”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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