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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다반사

탈출 4 완결

by 필팔청춘 2010. 12. 31.

4. 종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이 아프다. 얼마나 아픈지 두개골부터 뇌까지 바늘 수십 개가 박혀 있는 것 같다. 낑낑

거리며 참고 있으려니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 누굴까. 뒤를 돌아봤지만 밝은 햇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

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뭔가를 내민다. 도화지 한 장.

아...영미구나. 사랑스러운 내 딸 영미. 끔찍했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영미를 덥석 안고서 얼굴을

들여다본다. 썩어 가는 얼굴. 누런색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얼굴이 사악하게 웃고 있다.

“아줌마!”

형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주변의 광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

자 저만치서 상준이 모로 누워있다. 상준의 다리 주위는 뭔가를 엎지른 것처럼 액체가 흥건했는데, 자세히

살피자 그것이 시뻘건 색임을 깨달았다.

“여보!”

상준이 천천히 돌아본다. 얼굴은 흘러내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흡사 울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상준이 고통을 호소하며 양손을 다리 쪽으로 가져갔다. 흥건한 액체 한 가운데 그의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한쪽 발목에 시커먼 뭔가가 매달려 있었다.

둥그런 박 모양의 철제기구. 흡사 중세시대 여인들의 정조대를 연상케 하는 물건이 상준의 발목 깊숙이 채

워져 있었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듯이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그 주위로 손만 가져가는 상준이었다.

“아줌마, 정신이 드세요...?”

누군가 또 있었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모서리 쪽에서 포대자루를 깔고 앉아 있는 경주의 모습

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상준의 발목에 매달린 것은 경주가 앉아 있는 저 두툼한 포대자루에

서 나온 것이었다.

“아줌마 남편이 많이 힘들어 해요...저대로 두면 출혈과다로 죽을 수도 있구요...”

“뭐라고?”

형순이 다시 상준을 쳐다봤다. 바닥에 가득한 시뻘건 액체. 그것은 상준의 발목에서 흘러 나온 피였던 것이

다.

“멧돼지 잡는 덫 이예요...모르긴 몰라도 절반쯤은 절단 됐을 거예요...”

“미...미친년”

“아줌마가 먼저 우리 엄마 죽였잖아!”

경주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옆에 세워져 있던 막대기 비슷한 것을 주워 들고는 형순쪽을 향해 치켜세

웠다.

“죽여 버리고 싶어 미치겠어요...아줌마 젖통에다 대고 한발씩 쏴주고 싶어 죽겠다구요...”

형순이 자세히 보자 자신을 향한 것은 막대기가 아닌 기다란 엽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랬었군. 형순은 비로소 그것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인 게 아냐”

“아니요, 아줌마가 죽였어요...아줌마가 안 꼬셨으면 우리 엄마는 안 죽었어요...”

형순은 주위가 밝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완전히 드러난 경주의 추악한 얼굴을, 그것도 밝은 장소에서는 더

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영미는? 영미는 어디 있지?”

“거실에다 묶어 놨어요...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않으셔도 돼요...”

형순이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자신의 다리는 굵은 밧줄에 묶여 있는 상태였고, 이곳은 영미의 방인 듯

싶었다. 가구를 모두 빼내자 못 알아 봤던 것이다. 엎드려 있는 자신의 얼굴 왼편으로는 플라스틱 대야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가득 채워진 물 안으로 길쭉한 뭔가가 두 개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저

것은 젓가락일 것이다.

“아줌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젓가락에 대한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경주가 형순에게 말했다.

“아줌마가 기절해 있는 한 시간 동안 생각해 봤는데...”

“잠깐만, 우선 아저씨를 풀어줘. 그 다음에 얘기하자”

“가만히 있어 봐요...아직 말하는 중이잖아요...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영미는 아무 잘못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영미는 살려줄까도 생각했어요...”

“뭐...뭐라구? 그럼 우리는 죽이겠다는 말이야?”

경주가 희멀건 눈동자를 위로 까뒤집었다. 짐작컨대 어이없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 같았다.

“그럼 살려구 했어요...? 아줌마랑 아줌마 남편은 백 프로 죽일 거예요...내 말은 영미를 어떻게 하냐는

건데...”

“우...우리가 자...잘못했어, 너한테 시...실수한 거 같다”

상준이 고통을 참아가며 용서를 구했다.

“그래 경주야,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요, 아줌마 말은 거짓 이예요...”

“.......”

“저한테 약 탔잖아요...”

“뭐?”

형순이 일순 할말을 잃었다.

“나 재우고 이사 가려고 고기에 약 탔잖아요...저는 그것도 모르고 넙죽 받아 먹었네요...솔직히 말하면

아줌마가 조금 좋아지려구도 했었어요...”

“무...무슨 말이야? 여...여보 지금 경주가 무슨 말 하는 거야? 약이라니? 대체...”

상준의 말에 형순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더불어 경주에 대한 적개심이 맹렬히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실수 하셨어요...저한테는 내성이 있거든요...옛날에 너무 아파서 못 잘 때마다 수면제를 먹었었

어요...하도 많이 먹어서 나중에는 효과도 없었지만 말예요...”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형순의 대꾸에 경주가 재빨리 말을 쏟아냈다.

“두 분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어준다면 영미를 살려줄게요...옆에 있는 대야 보이시죠? 그 안에 있는 젓

가락을 저기 있는 구멍에 끼워 주세요...”

경주가 총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홍색 꽃무늬 벽지와 콘센트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설마...’

“맞아요...그 콘센트 구멍에 젓가락을 꽂으면 영미를 살려 줄게요...”

“말도 안돼!”

“미...미친 소리”

형순과 상준의 입에서 동시에 악소리가 터졌다.

“뭐 안하셔도 상관은 없어요...”

“만...만약 안하겠다면? 아...안하겠다면 어떻게 할거지?”

상준의 물음에 경주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총으로 셋 다 죽일 거예요...물론 훨씬 덜 아프겠지만...”

“미친년! 더러운 년! 쓰레기 같은 년!”

형순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저씨부터 선택하세요...어느 쪽이죠?”

형순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주가 상준에게 묻는다.

“자...잠깐만”

상준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 대신 초점 잃은 눈이 멍하니 젓가락만 향하

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상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죽겠어, 영미는 살려줘”

“여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안해,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다리는 아까부터 감각이 없고...아마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예전

처럼 거...걸어 다닐 수는 없을 거야”

"같이 결정해야지! 왜 자꾸 당신 혼자 결정해? 왜!"

상준이 말없이 자신의 대야 속에서 젓가락을 꺼내 들었다.

“아저씨 제가 셋을 셀게요... 못 꽂으시면 바로 머리가 날아 갈 겁니다...”

젓가락을 쥔 상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그의 손이 콘센트 바로 앞까지 이동하

자 경주가 셋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둘...”

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형순이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

“셋!”

“우아아악”

따닥 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형순은 결코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악...하악..학”

이상했다. 형순의 귀로 상준의 숨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여보”

상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와들와들 떨어대고 있었다. 젓가락 한쪽은 콘센트에 깊숙이 꽂혔지만, 다른 한쪽

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실패했네요...”

“타앙!”

방아쇠가 움직이자 천둥 같은 총성이 터졌다. 상준은 뒤통수가 완전히 으깨진 채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

다. 그의 주변벽지로 핏방울들이 세차게 흩뿌려졌다.

“마...맙소사...”

“아줌마 남편은 한쪽만 꽂았어요...두 군데를 동시에 꽂아야 전기가 통하는데 말이죠...”

“이...악마 같은 년...”

“이제 아줌마가 선택할 차례입니다...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선택해 주세요...”

경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형순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가 성공하시면 영미는 살려 드립니다...자 이제 셀게요...”

경주의 말이 달라졌다. 아까 전에는 둘 다 젓가락을 꽂아야 영미를 살려 주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자신만 성

공하면 살려주겠단다. 형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경주의 눈을향했다.

노란색 눈알. 허옇게 치켜뜨던 눈알이 비쩍 마른 동태새끼 마냥 노랗게 변해 있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그

것을 보며 형순은 확신이 생겼다.

‘미쳤다. 저 년은 확실히 미쳤다.’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했다.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형순의 시

선이 다시 대야를 향했다. 물속으로 굴절되어 있는 젓가락들이 보이자,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감전 당해 죽더라도 경주가 영미를 살려 준다는 확신이 없었다.

“하나...”

음산한 소리가 들렸지만, 생각을 멈추진 않았다. 젓가락을 꺼내기 위해 대야 속으로 손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닿자 불현듯 의문이 생겼다.

‘이 물은 뭐지? 단순히 전기가 잘 통하게 하려는 것인가?’

“둘...”

형순이 젓가락을 콘센트 구멍 쪽으로 가져갔다.

“잠깐만!”

별안간 형순이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으로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갔던 것이다.

“아줌마...허튼 수작 부리면 영미는 죽어요...”

“미안해, 너무 긴장해서 그랬어”

형순이 다시 젓가락을 갖다 대면서 계획을 정리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비록 자신은 죽겠지만 영미는 무

사할 것이다. 형순의 시선에 찰랑거리는 대야가 크게 새겨졌다. 대야에 담긴 물은 영미를 구하라는 신의 계

시요, 천사가 준 선물이었다.

“앗! 저기!”

경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문 쪽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형순이 대야를 뒤집었다. 물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

고, 경주가 다시 형순을 돌아봤을 땐 포대까지 닿아 있는 상태였다.

“죽어버려! 추악한 년!”

경주의 치맛자락과 발바닥까지 물에 닿는 것을 보고 힘껏 젓가락을 밀어 넣었다.

형순을 중심으로 찰나의 시간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경주의 노란 눈알이 웃고 있다고 느낀 것은 착각일까.

손가락 끝에서 뭔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을 때 형순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팔을 지나 어깨까지 올라 왔을 때는 제법 커다란 통증으로 변해 있었다.

“우워어어어..”

머릿속에서 빛이 번쩍했다. 뇌의 껍질이 강제로 벗겨지고 그 속으로 무수한 파편들이 쑤시고 들어왔다. 극

도의 고통과 함께 폭발할 것 같은 압력이 안구로 가득 쏠렸다. 펄펄 끓는 쇳물이 피 대신 전신을 돌고, 팔

다리가 미친 듯이 오그라들었다. 구운 오징어처럼 연골과 뼈까지 부수어 가며 한없이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금이 쩍쩍 가기 시작한 형순의 눈에 경주의 모습이 보였다. 벌러덩 자빠진 채 그녀도 자신처럼 바싹 오그라

들고 있었다. 경주의 얼굴이 다시 웃고 있다고 느꼈을 때 형순은 마침내 깨달았다.

물은 천사가 아니라 경주의 선물인 것을...

포대자루가 크게 요동을 쳤다. 잔뜩 들썩 거리던 포대의 한쪽 끝에서 뭔가가 불쑥 삐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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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련으로 무섭게 떨려대는 그것은 영미의 머리통이었다.

 

 


[이 게시물은 알피님에 의해 2010-10-28 23:25:41 공포에서 이동 됨]
[출처] 아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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